- 서울대 공예학과를 졸업하고 음악을 하다가 영화를 하게 되었다. 이력이 참 다양한데.
"중학교 때는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도 좋아하게 되었다. 미술보다 더 오래 했던 건 음악이었다. 미대를 갔던 건, 음대 갈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음악 다음으로 좋아했던 게 미술이라서 망설임 없이 미대를 지원할 수 있었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단지 표현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은 직접적이지만 그림은 좀 더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볼 수 있다. 두 가지가 합쳐지면 영화로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표현 방식이 너무 좋아서 영화를 택하게 된 것 같다. 고등학교 때 '32살이 되면 영화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그는 32살이다.) 음악적 꿈은 못 이뤘지만 계획했던 대로 되어서 너무 좋다."
- 배우와 전 스태프가 모두 술을 먹고 영화 촬영을 했다고?
"그거는…(머뭇) 나중에 영화홍보를 하게 되면 특별히 내세울 게 없을 것 같아서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가, '전 스태프가 술을 먹고 찍은 영화'라고 컨셉트를 잡았다. 그래서 아예 작정하고 스태프들에게 먹이기도 했다. (웃음) 배우들에게 술을 먹였던 건, 짧은 시간 안에 자연스러운 연기를 뽑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촬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술 먹은 상태를 찍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극 중 '옆방 여자'를 연기한 배우는 나랑 아침까지 술 마시다가 촬영에 들어가기도 했다."
- 영화 속에 감독 경험이 섞여 있는 것 같더라
"경험적인 게 섞여 있지만 조금 과장된 게 있다. (웃음) 영화 속 주인공인 혁진이 정선의 한 펜션에 머무르는데, 나도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 정선의 펜션에 간 적이 있다. 돈을 써야 그게 아까워서라도 무언가를 할 것 같았다. 눈이 엄청 오던 날이었는데, 정선에 가기 위해서 기차를 탔다. 흔히들 남자라면 '옆자리에 누가 앉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나. 진짜로 누가 앉긴 했는데 조금 애매한 분이었다. 얼굴이 예쁘기는 한데 나이 든 유부녀.
나는 시나리오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데, 그리고 그걸 즐기고 있는데. 자꾸 말을 거는 거다. 그분은 자기가 서울에 살았다는 걸 강조하면서 내게 인지를 시키려고 하더라. 나는 머쓱해 하면서 "네, 알겠습니다" 했지. 그분의 캐릭터가 극중 란희 캐릭터에 약간 투영되었다. 진평역에 내려서 펜션까지 걸어간 것도 영화 속 혁진의 모습과 같다.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길이 너무 적막해서 그런지 무서운 생각이 들더라. 이런 날 산짐승이 나와서 날 죽이면 아무도 모를 건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영화 속에서는 '호랑이 사건'으로 그려졌다.
그리고 펜션에 묵을 때 옆방 여자에 대한 캐릭터를 구상하게 되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여관이나 펜션에서 혼자 있다 보면 옆방에 소리가 들리면 궁금해하는 거. (웃음) 영화 속 많은 이야기들이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거다. 혁진이 게이에게 당하는 에피소드도 약간의 경험담이다."
- 감독님이 횟집 주인 역할로 잠깐 등장한다. 히치콕처럼 자신의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고 싶었나?
"그거는 의도한 거다. (웃음) 연기를 너무 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주인공인 혁진 역할을 하려고 했었는데, 연출하면서 연기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주인공이 힘들 것 같아서 '옆방 남자' 역할을 하려고 삭발까지 했었는데, 그 역할도 연출이랑 병행하기에는 힘들 것 같더라. 아, 연기는 정말 해보고 싶더라."
- 여성캐릭터가 인상적이다. '옆방여자'는 남성을 유혹할 만한 캐릭터이다. 혁진에게 상처를 주기는 하지만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꼬시기만' 하는 여자. 요즘 표현을 빌리면 "남자를 어항 안에 가두는 여자"라 할 수 있다. 남자들이 자기를 짝사랑하게 만들어놓고는 나 몰라라 하는 여자다. 예를 들어서 남자가 혼자 짝사랑하다가 마음을 접으려고 하는데 딱, 그때 전화해서는 남자 마음을 흔드는 여자.
미워도 미워할 수가 없는 여자들이 있다. 그런 캐릭터를 한 번 그려 보고 싶었다. 영화에서 옆방 여자가 혁진에게 다가와 술 사달라고 조르는데, 혁진의 다리까지 만진다. 그러면 남자들은 "이 여자가 날 좋아하나?" 하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순진한 남자를 혹하게 하는 여자인 거다."
- 버스 정류장에 있는 슈퍼마켓 사장님은 현장 캐스팅인가? 할머니의 대사 리듬감이 매우 특이하다.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와 이영애에게 밥을 주시던 할머니가 생각날 정도로 구수하고 좋더라.
"허름한 슈퍼를 알아보다가 스태프들이 찾은 장소다. 처음에는 부탁을 하니 거절하시는 거다. 그래서 직접 찾아갔더니 화장을 곱게 하고, 촬영할 준비를 다 하고 계시더라. 촬영하면서 너무 즐거워하셨다.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할머니 연기가 어색하다. 근데, 오히려 그런 정색하는 연기가 영화에 기여를 한 것 같다. 표정하나 건조한 말투로 "호랑이도 나와"라고 하는 대사가 관객에게 제대로 먹혔던 것 같다. 할머니께 정말 감사드리고, 나중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다."
- 영화 속에서 텅 빈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장날인 줄 알고 갔는데 시장이 텅 비어 있거나, 겨울 바다의 썰렁한 풍경들이 주인공을 처량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그런 풍경을 좋아한다. 영화적으로도 공간감을 표현하기에도 좋은 것 같다. 적막함이라고 할까. 텅빈 공간을 통해서 주인공의 외로움이나 쓸쓸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다."
- <낮술>은 1000만원이라는 저예산으로 찍은 영화다. 제작비를 어머님께서 지원했다고 하던데.
"지금까지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지만, 어머니는 내가 하는 걸 늘 믿어주셨다. 영화한다고 했을 때도 외려 내게 위로를 해주시면서 천천히 하라고 하셨다. 늘 내게 위로를 주시는 분이다. 참 감사한다."
- <낮술>은 독립영화답지 않게 웃을 수 있는 요소들이 풍부해서 좋은 영화였던 것 같다.
"독립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닌데, 독립영화하면 우울한 이야기거나 생각이 많이 들어간 영화라는 느낌을 받는다. <낮술>을 통해서 독립영화도 가볍고, 웃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들이 안 웃어줬으면 큰일 났었을 텐데. 그나마 참 다행이다. (웃음) 또, 이 돈(1000만원) 가지고도 장편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주변에서 만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맘고생도 심했다."
*위 인터뷰는 2008년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중 이뤄졌으며, 감독의 동의 하에 <오마이뉴스>에 재편집해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