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의 피아노4중주 3번 op.60"
브람스의 피아노4중주 작품60은 겨울에 들어야 하는 곡이다.
그리고 실연의 아픔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곡이다.
듣는 이를 대신하여 눈이 내리듯 펑펑 울어줄 것이다.
브람스의 고향인 함부르크는 북유럽에 위치한다.
그곳의 겨울은 음산하다.
편서풍의 영향으로 겨울 내내 차가운 바람이
북해에서 불어오고 진눈개비인지 눈인지 모르는 습기찬 방울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어두운 비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해는 짧아 웅크린 나무들은
숨을 데를 찾지 못해 울부짖는다.
그런 겨울의 풍경을 연상하며 이 곡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실연의 아픔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곡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한마디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까다로운 음악이다.
음악 자체는 순수하게 아름답지만
작곡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감정의 복선이 이 곡의 뒤안길에
너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음울한 겨울에 맑은 햇빛을 찾거나 생애의 희열을
확인하기 위해 음악을 들으려는 사람들에게
이 곡은 위험스러운 곡이다.
순수 음악에서 어떤 의도적이고 목적적인 것을 찾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미학에서 아름다움과 예술품은
창작된 순간부터 창작자의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것이다.'라 했다.
또 음악의 선율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듣는 이의 마음에 이미 어떤 아름다움이 내재해 있어
음악과 마음의 선율이 합쳐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람스가 그의 피아노4중주 op.60에서
분명 실연의 아픔을 표현하고자 하였다면,
그리고 그 곡을 듣는 감상자들 역시 동병상린에 시달리고 있다면,
이 때 감상자들의 이 음악에 대한 공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절실할 것이다.
결국 음악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에그몬트 서곡을 괴테에게 헌정하였지만
막상 괴테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이가 든 그는 젊은 베토벤의 격렬함을,
그리고 자신이 젊었을 때의 격정을 그만 잊고 싶었던 것이다.
이해와 공감은 다른 것이다.
나는 브람스의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실제로 나 자신이 젊었을 때 성음사에서 발간된 이 곡을
판이 닳도록 들은 적이 있었다.
같은 판에 드보르작의 아름다운 둠키 트리오 Dumky-Trio가
실려 있었지만 그 곡은 거의 안 듣고 브람스만 들었다.
당시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후 이곡은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다가
슈만의 피아노 5중주와 더불어 음악에서 사랑의 표현은
어떤 것일까하는 주제가 떠올라 수십 년만에 이곡을 다시 들었다.
물론 다른 LP로 듣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옛 생각이 아련히 다시 떠오른다.
브람스의 피아노4중주 No.3 op.60은 1875년,
그가 우리나이로 43세에 작곡한 것이다.
그의 음악이 한창 완숙미에 이르렀을 때 작곡된 것이다.
그러나
이곡은 그의 피아노4중주 세곡중에서 번호와 연대는 마지막이지만
실제로 구상된 것은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다.
이 곡은 보통의 사중주가 모두 그렇듯이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2악장 Scherzo - allegro
3악장 Andante
4악장 Finale - allegro
첫 악장은 강한 피아노 포르테로 시작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현들의 짤막한 소리는 음산하고 우울하다.
시작부터가 무거운 것이다.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이 어디 가벼울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분위기는 1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한다.
울렁거리는 듯 나오는 피아노의 주제도 그렇고,
그 주제를 따라 부르는 현의 노랫소리도 마찬가지다.
브람스 특유의 반복되는 긴장감이 분위기를 더 가라앉게 한다.
간혹 격렬함이 있지만 그 것 역시 사랑의 아픔으로
견딜수가 없어서 터져나오는 고통스런 격정일 뿐,
다시 울음을 먹으며 조용히 내려온다.
사실 브람스가 전곡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감정은 이미
일악장에 모두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악장은 대립되거나 전개되는 항에 불과하다.
이악장 스케르죠는 일악장의 슬프고 비통한 감정을 반전시키려는
대립의 항으로 설정된 것이고,
삼악장 안단테는 일악장의 감정을 다시 되풀이하여
서정적으로 전개한다.
그리고 사악장에서 마무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곡은 전곡이 답답할 정도로 음울하고 비통하다.
아름다운 모차르트가 들으면 기절할 곡이다.
브람스의 곡들이 대부분 조용히 내면을 파고들어 어두운 분위기를 갖는데,
피아노4중주 3번은 그 중에서도 유난스러울 정도로 깊고
어두운 나락으로 한없이 빠져든다.
이는 브람스가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을 바탕으로
극히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클라라에 대한 사랑의 좌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감정과 행동,
그리고 스스로 미워지는 자신, 그리고 다시 나타나는 절망.
그가 클라라를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셋이 되던 해였다.
슈만이 그의 음악잡지
'음악의 신비평'에 브람스를 새로운 물결이라고
소개하여 브람스는 시골이나 마찬가지인 함부르크에서 일약
독일의 음악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지 얼마 후였다.
그가 슈만과 클라라 부부가 살고 있는 듀셀도르프를 방문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슈만의 자살기도와 광기,
그리고 클라라에게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
그녀와 함께 하였던 라인강지역과 단찌히로의 연주여행,
여행도중 바다를 보고 싶다는 철없는 그의 희망을 어루만져주는
여인의 부드러운 심성,
그리고 마침내 슈만의 죽음. 젊고 감수성이 강한 브람스에게
이는 충격 이상이었을 것이다.
열네살이나 더 많은 여인에게 불꽃처럼 느껴진 그의 감정은 연민인가,
사랑인가, 동정인가, 충동인가. 하여튼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쫓겨나듯 듀셀도르프를 떠나 일시 함부르그로 돌아간다.
어떤 심정으로 떠났을까.
여인은 아름다웠다.
당시에 그린 초상화를 찬찬히 드려다 본다.
가르마를 타서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넘겨 묶고,
달같이 밝은 이마 위에는 머리띠로 가느다란 줄이 지나
뒷머리로 젖혀졌다.
깊은 쌍거풀에 큰 눈. 무엇인가 그리움인가 상념에 젖어
바라보는 눈길이 커다란 호수에 떠 있는 달처럼
동그란 것이 깊고 그윽하다.
그 깊은 눈은 아마 바라보는 사람들의 혼을 뿌리째
흡입하려는 듯 매혹적이다.
그리고 기다랗고 높은 코, 갸름한 턱에 조그만 입술.
햐얀 목덜미에는 화려하지 않고 그저 수수한 목걸이가 걸려
아래 가슴으로 드리우고, 풍만한 가슴에는 숄이
무엇인가 가리듯 걸쳐 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여인이 피아노는 왜 그리 잘 치는가.
피아노 건반이 울릴 때마다 브람스의 가슴은 마구 뛰었으리라.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슈만.
그리고 그가 광기로 라인강으로 뛰어 들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병원에 갇혀 살다가 얼마 안 있어
저 세상으로 떠났다.
저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홀로 되다니. 불쌍한 사람 클라라,
아니 불쌍한 사나이 브람스.
그들의 관계는 지금의 우리가 볼때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답답했다.
소위 플라토닉 사랑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욕망을 밖으로 터트리지 않고 억제하거나 짓누르고 있으면,
그것은 독이 되고 또 절망으로 화한다.
그랬다. 1868년 그의 일악장 스켓치에는
스스로 총을 쏘아 죽으려는 그리고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는
남자를 생각해보라'라고 적혀 있다.
얼마나 절실한 호소요, 외침인가.
상처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 절망에 빠져든 사나이가
바보처럼 자살을 하려는 심정,
바로 그러한 처절한 감정이 전곡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1874년 브람스가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말한 젊은 베르테르의 심정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중주는 스물네다섯 나이에 구상이 되기 시작한것이 틀림없고,
슈만이 죽은지 십이년이나 지난 1868년 1악장을 스켓치할 때에도
그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클라라와의 어렵고 달콤한, 하지만 생각만 하여도 몹시 쓰라린
관계는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 곡은 하마터면 사라질 운명이었을 텐데..
브람스는 나이가 들어 이제 사랑을 승화시켰는가,
아니면 극므杉째?
1875년 손을 더 본 다음에 이 곡을 드디어 발표한다.
마음에 안 드는 곡을 수없이 파기시켜 버린
그로서는 의외의 일이라 할 만한데,
아마 브람스는 이 곡이 그의 인생에서 스스로를 표현한
몇 안 되는 사실적인 기록이기에, 부끄럽지만 남겨둘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다 아는 사실이지만 브람스는 죽을 때까지 결혼을하지 않고
혼자 살다 죽었다.
여러 여인이 스쳐 지나가고 있지만 결국 그에게는
한 여인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저 멀리 세상을 떠나자 브람스는 일년도 안되어
그녀를 따라간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껏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사랑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노래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인류가 존속되는 한 사람들은 사랑을 노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브람스의 사중주를 들으며 느끼는 것은
사랑은 즐거움이라기보다 눈물의 씨앗이요,
슬픔을 잉태시키는 고통의 덩어리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던 브람스에게 연민의 정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 스스로 이러한 감정을 다시는 갖고 싶지 않아,
아마도 브람스의 피아노4중주 제3번은 앞으로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그것들은 아름다운 것이다.
비극적인 것도 아름답다고 하지만, 짧은 인생에서 아름다운 것은
진정 고통과 슬픔 없이 그저 순수하게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 모차르트를 듣는 이유이다.
슈만의 피아노 5중주 op.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