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옴니버스

요한 세바스챤 bach 미사 b단조

구반 2008. 7. 28. 15:02

짜잔, 잠깐 상식퀴즈! '피아노의 시인'은? 그렇다. 쇼팽이다. 그런데 쇼팽이 피아노곡만 썼을까? '가곡의 왕'은? 슈베르트. 빙고, 정답이다. 그런데 그의 '8번 교향곡' 일명 '미완성'에는 노래가 들리지 않는데...... '교향곡의 아버지'는? 하이든? 100곡 이상의 교향곡과 약 70곡에 이르는 현악4중주곡으로 근대 음악의 틀을 세운 것은 확실한데 오늘날 사람들은 9개 쯤 작곡한 베토벤, 말러, 슈베르트, 브룩크너 등의 교향곡을 더 잘 많이 듣는다.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마지막으로 '음악의 신동'은? 모차르트. 역시 정답. 물론 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존 지오반니>, <코지 판 투테>, <마술피리>는 물론 후기 교향곡들과 <레퀴엠> 등은 모두 서른 살이 넘어서 작곡한 것들이다. 아무래도 신동의 작업은 아니다.

물론 '신동'이니 '왕'이니 '시인'이니 하는 표현들은 해당 음악가를 단번에 떠올리게 해준다. 그러나 그 폭넓은 세계가 너무 안이한 표현들로 압축되는, 상식 통조림에 우겨넣는 일만 될 뿐이다.

지나친 얘기라구? 글쎄, 그렇다면 '음악의 어머니'는? 헨델, 역시 빙고. 정답이다. 그런데 헨델은 남성이다. 아마도 '음악의 아버지'에 비춰 '어머니'라는 표현을 쓴 듯하다. 그 '아버지'는 바흐다. 바흐에 비하여 조금 낮춘 듯 '어머니'를 쓴 것인데, 헨델이 남성이라는 점 뿐만이 아니라 '어머니'를 '아버지'에 비해 낮춰보는 표현으로 삼은 것이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마저도 과장이라구? 그렇다면 검색창에 '음악의 어머니'라고 써보기 바란다. 헨델에 관한 수많은 언급이 나올뿐더러 심지어 헨델을 '음악의 어머니'라고 버젓이 써넣은 책이며 cd들이 최근 몇 해 동안에도 많이 출간되었다. 그것도 어린이 책들에서 말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음악가를 그 당대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슬며시 떼어놓은 채 '고독과 맞싸우다 간' 사람들 정도로 매우 감상적인 표현을 남발하는 경우이다. 음악가를 제 운명의 덫에 걸친 심약한 환자로 여기는 이 진부한 표현들은, 단순한 표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음악을 보다 넓은 틀에서 깊이 성찰하는 길을 차단하고 만다. 이마저도 과장이라구? 그렇다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클래식 전문 FM 방송을 켜놓기 바란다. 광고가 없어서 듣기 참 좋은 방송이지만, 진부하고 감상적인 내레이션 때문에 곡목만 짧게 소개하고 음악을 내내 틀거나 차라리 광고라도 넣었으면 할 때가 있다. 모차르트나 슈베르트가 듣다가 관 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날 것 같은 낯 간지러운 얘기들이 넘쳐난다.

성토마스교회의 회랑 모습.

그런데 딱 한 사람, 예외가 있다. 다른 음악가들은 '시인'이나 '신동'이나 '왕' 같은 표현이 그들의 깊이 있는 세계를 가로막는 기능만 하지만 단 한 사람, 1750년의 오늘, 7월 28일에 세상을 떠난 요한 세바스찌안 바흐 만큼은 그 표현이 비교적 적절하다. 헨델을 '어머니'로 표현한 것은 우스운 노릇이지만, 만일 '음악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굳이 써야 한다면 역시 바흐가 가장 어울리는 음악가다.

바흐의 집안은 중부 독일의 튀링겐 지역에서 뿌리를 내려 16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6대에 걸쳐 음악 장인의 전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바흐 역시 가문의 전통에 따라 일찍부터 음악가로의 일생을 시작하였다. 그는 다른 작곡가의 악보를 사보하거나 편곡하는 일부터 익혔는데, 근면한 바흐에게 이 일은 선배 작곡가의 음악어법을 정공법으로 흡수해버리는 유일하고도 매우 효과적인 길이었다.


바흐는 아른슈타트와 뮐하우젠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으며 바이마르 공작의 예배당에서는 오르간을 다루었고 서른이 넘어서는 쾨텐의 궁정 악장을 맡았다(1717-1723년). 쾨텐 시절에 바흐는 교육용 클라비어곡들과 궁정의 유희를 위한 기악 합주곡들을 작곡하게 된다. 바흐는 각종 악기의 모든 신경계통을 완벽하게 조율할 줄 아는 외과의사이자 악기 고유의 내밀한 성감대를 어루만져 극치의 오르가즘에서 터져나오는 환희의 교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경악에 가까운 능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독일 왕정의 일시적 평안과 맞아 떨어지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의 화사한 선율, 첼로의 무한한 가능성의 극한을 이끌어낸 <무반주 첼로 모음곡>, 어린이 교육용 소품이면서도 당대의 거장들이 예술가적 운명과 자존을 걸고 정면승부를 펼치게 만드는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그리고 수많은 오르간 곡집과 협주곡들. 이 쯤에서 바흐가 음악적 일생을 마쳤다 해도 그는 '음악의 아버지'는 아닐지라도 '음악의 큰 삼촌' 정도는 된 셈이었다.

독일월드컵 당시 라이프치히 어느 빌딩에 그려진 바흐의 모습

잠시 그의 형편을 생각해보자. 인류가 지금보다 한 3백 살 쯤 어렸을 때, 그러니까 1685년에 태어난 바흐가 필생 동안 사용하게 될 음표 체계를 선천적인 예지로 체득하면서 10대의 뜨거운 나이로 진입할 즈음은,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예술적 환경과는 턱없이 다른 조건들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다.

바흐 당시에 음악가는 궁정이나 시 당국의 요리사, 마부, 정원사, 하급 관리 등과 같은 성격의 고용인이었다. 바흐는 괴텐에서 라이프치히로 옮기면서 고용 계약서를 썼는데, 전체 13조로 되어 있는 계약서에는 '성실하게 학생을 지도한다', '시의회를 존경하고 복종한다', '시의원이 음악을 원하면 바로 학생을 보내야 한다', '학교 당국과 검열관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교회의 지출을 줄이기 위해 학생들에게 성악뿐만 아니라 기악도 가르쳐야 한다', '학교 당국의 허가 없이는 절대 도시를 떠나서는 안된다’ 등으로 작성되어 있다. 특히 그 한 대목에는 '의전 때에는 학생들 옆에서 행렬에 참가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의 하급 고용인 계약서에 지나지 않는 종이에 사인을 할 수밖에 없는 바흐였지만 실제로 그와 같은 대접만 받았는지는 의문이다. 30여 년을 봉직하였고 수많은 걸작을 쓰면서 점점 라이프치히의 주요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 계약서 보다는 형편이 좀더 나았을 것이다.

아래 소개하는 노래(미사)는 바흐의 대작 <미사 B 단조> 중에서 'Agnus Dei'(천주의 어린 양)을 안드레아스 숄이 부르는 것이다. 꼭 끝까지 들어보기 바란다. 악보가 정확하게 같이 걸어가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듣다 보면,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성소의 가장 그윽한 자리로 바뀐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바흐는 '중세의 겨울'이 자신에게 맡긴 음악적 유산을 바탕으로 30대 중반에 취임하여 1850년에 숨을 거둘 때까지 봉직했던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 칸토르(악장) 시절에, 적어도 음악에 있어서는 유일하게 근대의 문턱을 넘어선 음악가가 되었다. 칸토르 취임 이듬 해에 를 봉헌한 바흐는 <푸가의 기법>과 <마태수난곡>을 작곡하였다.

드레스덴에서 바흐를 계승한 루돌프 마우에르스베르거

특히 바흐의 오르간 곡은 그의 모든 곡으로 흘러내려가는 시원의 젖줄이다. 잠시 개인적인 기억을 회고하건대, 나는 지난 2006년에 월드컵 취재로 독일에 있었다. 쉼없이 차량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아우구스부르크에 들어섰을 때는 졸음 운전에 가까웠다. 닷새 동안 그는 하루에 겨우 네댓 시간을 빼놓고는 하루 종일 차를 몰았던 것이다. 그런 기운 때문에 성 안느 성당에 잠시 앉아 있는다는 것이 잠에 빠지게 되었다.

얼마쯤 흘렀을까. 누군가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기척 때문에 잠에서 깼다. 노인이었다. 노인은 열주 사이로 사라지더니 교단의 2층 구석으로 나타나 십자가 아래의 오르간에 앉았다. 노인은 오르간의 건반 하나를 꾹 눌렀다. 관광객도 모두 사라진 한가로운 오후의 작은 성당에 묵직한 소리들이 꽉 차기 시작했다.

노인은 자세를 가다듬고는 성가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꽤 오랫동안 들어왔다고 여긴 바흐의 오르간에 대한 모든 기억을 송두리째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동안 내가 들었던 그저 전자제품에서 새어나오는 음향이었던 것이다.

아래 소개하는 동영상은 20세기 바흐 음악의 절대적인 공헌자인 칼 리히터가 유명한 'toccta und fugue'를 연주하는 모습이다. 칼 리히터 옆에 서있는 보조 연주자도 주목하기 바란다. 그는 무슨 역할을 할까?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의 공기 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그의 보조로 6단으로 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쏟아낸다.



그때, 성안느 성당의 오르간 소리는 수많은 파이프에 의해 광대역으로 확장되어 성당 내부의 회랑과 열주와 십자가와 벽과 의자들 사이로 흐르면서 홀로 앉아 있는 내 몸을 휘감았다. 이 기억에 대하여 나는 어느 주간지에 "어디서 시작하여 언제 끝날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소리는 서로가 서로를 애무하고 또한 공명시키며 끝없이 변주되고 확장되어, 마침내 성당 가득히 미묘하고 기이한 공기의 울림을 형성해 어느새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여행자의 뼈와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기둥을 돌아나온 음, 회랑을 스쳐나온 음, 궁륭을 거슬러 올랐다가 하강하는 음, 의자 사이로 빠져나온 음들이 아홉 갈래 머리를 풀어헤치며 여행자의 온몸을 휘감았으므로, 여행자는 그 순간 진심으로 기도를 하고 싶어졌다."고 쓴 적 있다.

라이프치히에서 바흐를 계승한 귄터 라민.

일종의 음악적 ‘계시’에 가까운 이 순간에 나는 왜 바이올린이나 트럼펫이 아니라 파이프오르간이 성당의 가장 높은 자리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소리는 은총의 계시이며 거룩한 위로였으며 때로운 분노의 징벌이기도 했다. 그런 음들이 그런 세계를 형성하고 있을 무렵에 바흐는 매일같이 오르간 건반을 눌렀던 것이다.

중세의 가을과 겨울은 어떤 점에서 ‘철학적인 여행의 시대’였다. 데카르트가 세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유럽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시작된 철학적 여행은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으로 정점에 달하였으며 근대 초기의 풍운아들, 곧 바이런과 샤토 브리앙, 카사노바 백작과 스딸 부인 등은 유럽 곳곳으로 철학적 여행과 정치적 망명과 문화적 기행을 떠돌았다.

유일한 예외가 바흐다. 어떤 음악사가는 바흐가 독일 국경을 한 번도 넘지 않았다고 말한다. 바흐는 성토마스교회에서 하루 4시간 씩 학생들에게 음악과 라틴어를 가르쳐야 했고 매일 저녁마다 칸타타를 써야 했으며 크고 작은 미사와 전례를 위한 곡을 봉헌해야 했으며 그 틈틈이 음악 교본집까지 작곡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바흐는 독주곡을 합주곡으로, 건반음악을 합주협주곡으로, 작은 소품을 칸타타 곡으로, 또 그 칸타타 곡을 대작 미사곡으로 '리메이크'를 하였는데, 아무래도 고된 일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바흐가 수도 없이 자기 곡의 조성을 바꾸거나 악기 파트에 변화를 주거나 소편성을 대편성으로 확장한 것을 눈치채지 못하거나 오히려 그 자유로운 변화를 유감없이 받아들였다. 바흐의 천재성과 고된 일과가 결합하여 음표의 수수께끼와 음악이라는 비밀의 문이 열린 것이다.

정격연주의 대표자 존 엘리엇 가디너.

그런데, 이런 업적을 이룬 사람을 유독 '아버지'라고 해야 하는가, '어머니'라고 높이 부르면 안될까 싶으면서도, 어쨌거나 '음악의 아버지'는 곧 바흐로 굳어진 것인데, 위와 같은 음악적 업적만으로 그런 표현이 가능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근대의 문턱을 경건하게 넘어섰다는 것이다. 다른 도시가 궁정에 의해 정치와 문화가 발달했다면 일찌감치 상업이 발달한 라이프치히는 중산층 시민 문화가 그 도시의 기틀이 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보다는 느리지만, 그래도 독일 권역에서 중세의 잔영이 가장 빨리 흐려진 곳이 라이프치히였다. 라이프치히는 인근의 드레스덴, 예나, 바이마르 등과 함께 근대 문화 도시의 면모를 가장 먼저 갖추었고 또한 이 도시들의 지도자들은 문예부흥을 이끌었다.

바흐는 그 조화로운 공간에서, 비록 중세의 겨울이었지만, 근대라는 새 봄을 예감하며 가르치고 기도하고 작곡하고 연주하였다. 언젠가 쓴 표현인데, 미술사학자 보링거는 중세 고딕 건축에 대해 ‘숭고한 노이로제’라고 하였다. 이 표현에 가장 어울리는 음악가가 바흐이다. '음악의 아버지?', 글쎄, 아무래도 너무 단편적이다.

바흐의 고전!
미사 B 단조 | 바흐 작곡 | 칼 리히터 지휘 | 유니버설뮤직

이 블로그가 매일 책을 소개하지만 오늘은 음반 세 개를 골랐다. 그런데 무엇을? 1천 곡이 넘는 바흐 작품들에서 '딸랑 세 개'를 고르기가 참 난감했다. 거의 모든 악기, 거의 모든 장르, 거의 모든 양식에 걸쳐 바흐는 절대적인 곡들을 남겼다. 그 연주와 해석들도 수천가지가 넘는다. 파블로 카잘스, 니콜라예바, 칼 리히터, 헬무트 발햐, 헨릭 쉐링, 레온하르트...... 이루 셀 수가 없다. 그래서 단 한곡, '미사 B 단조'로 선택했다. 그 첫 번째는 칼 리히터 지휘다. 귄터 라민의 뒤를 이어 20세기 중엽 대편성의 바흐 해석에 가히 독보적인 위업을 이룬 지휘자다. 위 본문에서 오르간 곡을 연주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DVD는 1969년 작품으로 '미사 B 단조'의 장려한 흐름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군둘라 야노비치, 회르타 퇴퍼, 헤르만 프레이 등이 독창을 한다. 만약 음반을 고른다면, 마리아 슈타더, 회르타 퇴퍼,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키에스 엥겐이 독창을 맡은 1962년 작품이 있다. 한 번 듣게 되면, 평생 듣게 되는, 그런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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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너의 정갈한 연주
1996년에 존 엘리엇 가디너가 내한하였다. 내 옆에 앉은 누군가가 음악에 맞춰 너무 자주 고개를 흔든 것 빼고는, 그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천상의 무대였다. 바흐 시대의 옛날 악기로 지나친 표현이나 군더더기를 생략하고 정갈하게 빚어내는 그때의 연주에서 어느 소년이 한걸음 앞으로 나와 독창을 했다. 그 소년은 그때 천사였다. 20세기 중엽의 압도적인 대편성과 다소 과장된 해석과 달리 바흐 시대의 고졸함으로 되돌아가려한 일련의 지휘자들, 그러니까 구스타프 레온하르트, 앤드류 패롯, 톤 쿠프만, 르네 야콥스, 니콜라스 아르농쿠르, 펠리페 헤르베게 등이 모두 이 곡을 녹음하였기 때문에 어느 연주라도 우선 듣는 것이 중요하거니와, 1996년의 늦가을, 어쩌다 맨 앞 자리 표를 구한 덕분에, 내 바로 앞에서 두 시간 동안 고졸한 미사를 올린 가디너를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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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동독의 문화 유산
미사 B 단조 | 바흐 작곡 | 루돌프 마우에스베르거 지휘 | Berlin Classics

지난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라이프치히를 갔다. 그곳에서 프랑스와의 조별리그 2차전이 열렸는데, 그 빈틈을 이용하여 성토마스교회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런데 그 도시에 마땅한 숙소가 없어서 드레스덴에서 잤다. 오히려 금상첨화! 빠듯한 일정 때문에 생략할 뻔했던 고도 드레스덴에서 하루를 머물 수 있었던 것이다. 드레스덴의 음악은 십자가교회가 거점이다. 바흐 이전의 음악가 하인리히 쉬츠가 그곳에 있었고 구 동독 시절에는 루돌프 마우에스베르거가 있었다. 1시간 거리의 라이프치히에 귄터 라민이 있었고 또한 그 제자 칼 리히터가 있었다면 드레스덴은 마우에스베르거가 지켰다. 그의 <마태수난곡>이 당대의 연주로 손꼽히거니와 <미사 B 단조> 역시 신성한 명반이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연주와 드레스덴 십자가 합창단, 그리고 테오 아담이나 에른스트 헤플리거 같은 성토마스 교회 출신의 독창자들이 지하예배소의 기도와 같은 노래를, 아니 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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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정연수의 booking365

 

리히터의 오르간연주는 늘 짜릿하다

저음에 움직임...쉴새없는 발들의 정교한 움직임

과연 인간의 쓰임새는 어디까지 작동하는 것일까?

고등학교때 들었던 토카타와 푸가가 새롭게 들린다

무더위가 날라가는 기분이네...요